프랑스 혁명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여러 번 일어나는데 그중 1789년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이 가장 유명하다. 때문에 편의상 프랑스 대혁명을 줄여서 프랑스 혁명이라고 하겠다. 가톨릭이라는 종교는 유럽을 지탱하는 정신적 기둥이다. 몽골제국이 세상을 휩쓸고 나서 타격을 입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은 여전히 가톨릭을 지지했다.

 

그러던 중 1518년 마틴 루터 종교개혁이 시작된다. 150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프랑스 개신교도 들은 종교개혁운동을 했고 사람들은 이들을 위그노라고 불렀다. 프랑스에 전파된 루터주의는 노동자와 귀족들에게 확산되었다. 이유로는 가톨릭의 율법과 체제가 장사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톨릭이 정한 축일이 너무 많아 장사할 시간이 부족했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프랑스 혁명은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농경 체제 그리고 지주들에게 유리했지만 상인들에게는 좋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위그노들은 대부분 상인, 수공업자, 은행가들인데 이들은 스페인 종교재판소 추방과 관련이 있다. 유대인들과 함께 금융업, 상업, 제조업에 매진했던 이들은 추방 이후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로 이주하여 세력을 구축한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기원은 바로 위그노들에게 있다. 1561년 프랑스 위그노 교회는 2000개, 신도들은 200만이 넘게 되었다.

 

많은 귀족들이 칼빈주의 사상에 동의했으며 프랑스 부르봉 왕가 역시 위그노 교회에 합류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역사가 이렇게 진행되었으면 프랑스 혁명도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1562년 기즈공작이 이끼는 토벌대가 바시에서 예배 중인 위그노 70명을 살해하고 1572년 본격적인 위그노 토벌이 진행된다. 무려 9천 명에 달하는 위그노들이 학살되었다. 브루봉 왕가는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1598년 앙리 4세가 위그노 전쟁을 끝내기 위해 낭트 칙령을 발표한다.

낭트 칙령으로 위그노들은 한숨 돌렸지만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1651년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파가 승리하여 가톨릭 세력을 몰아낸다. 1685년 루이 16세는 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 칙령을 폐지한다. 국론을 통합하고 강한 프랑스를 건설하기 위한 계책이었으나 오히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1685년 까지 프랑스 위그노 해적은 대단했는데 낭트 칙령 폐기 이후 유대인과 위그노들의 기술 유입, 자금 유입이 줄어들게 되고 바다를 영국에게 내주게 된 것이다. 1688년 영국이 명예혁명으로 가톨릭 세력을 몰아낸 것에 비해 프랑스 쪽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위그노와 유대인들은 독일로가 기계공업을 일으키고 영국으로 가 최첨단 기술을 전수하여 산업혁명의 모태가 된다. 1593년 네덜란드에 집결한 위그노와 유대인들은 네덜란드를 해상강국으로 건설한다. 스코틀랜드 귀족인 호프가 밑에서 큰 프란시스 베어링 그리고 영국 엘리트들은 프랑스의 국력을 경계했다. 인도, 중국 차 무역, 캐나다 모피 무역에서 프랑스가 유일한 경쟁 상대였기 때문이다.

스페인, 포르투갈과의 해상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한 것은 네덜란드인데 네덜란드는 아무리 강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좁고 협소한 땅으로 어떻게 세계를 경영할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육군을 키워 영토를 늘리는 것은 의미 없고 바다를 차지해야 세계를 차지한다는 것은 당대 상식이다. 결국 네덜란드는 영국에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중간기지인 것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위험한 암스테르담 항구 대신 안전한 런던 항구를 이용하면서 영국의 국력이 더 강해진다. 프란시스 베어링과 유대인 연합은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프랑스에게는 이자를 두배로 해서 빌려준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독립전쟁이 끝나고 재정이 파탄나 프랑스 혁명의 결정적 원인이 된다.

한편 가톨릭에 대항하는 반가톨릭 연합은 클랜을 구축하면서 세력을 결집한다. 영국의 명예혁명으로 보면 알 수 있듯이 프랑스 혁명은 필연이지만 그것이 단기적으로는 프랑스 국력이 망가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프랑스 혁명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혁명, 영국의 명예혁명은 결과적으로 성공한 혁명이다"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득 본 위그노와 유대인

1775년 4월 19일 총성이 울렸다.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와 대영제국 간의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자유의 아들들이라는 단체가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키면서 급속도로 영국과 사이가 나빠진 것이

f1231.tistory.com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