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중일전쟁 1937년 7월 7일 ~ 1945년 9월 9일

 

2차 세계대전 중일 전쟁은 중국인들이 합심하여 일본과 싸우는 구도였으나 속사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제스, 마오쩌둥, 일본 이렇게 3개의 세력이 뒤엉킨 전쟁이었다. 장제스는 일본군과 열심히 싸웠고 마오쩌둥은 일본과 적당히 싸우는 척하며 주 목표는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것에 있었다.

 

장제스와 국민당군의 실력

중일전쟁이 일어나기전 1차 국공 내전에서는 장제스가 마오쩌둥 공산당으로부터 완승했고 군사력의 차이는 비교 조차 되지 못했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일본군과 싸우는 동안 마오쩌둥은 힘을 키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마오쩌둥의 공산당군은 장제스의 국민당군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약했다.

2차 세계대전의 클라이막스인 1945년 8월 6일에서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일본제국이 원폭으로 인해 무너지자 소련은 8월 9일부터 8월 20일까지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진행한다. 이 작전은 일본 제국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전역을 공격하는 작전이며 동시에 몽골, 사할린, 쿠릴열도 한반도 까지 포함된다.

 

국제정세의 변화

여기 중요한 것은 만주를 차지한 소련이 물자를 마오쩌둥 공산당군에 몰아주어서 마오에게 승리를 안겨준 것이다. 마오가 이러한 지원을 받게 된 것은 국제정세의 변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장제스가 힘을 키울 시점에는 제임스 로스차일드의 간접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영국과 소련의 단교 사건 이후 마오는 버트런드 러셀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일본군의 공세도 대단했지만 국민당의 장제스 군은 잘 정비된 군대와 결사의 각오로 수많은 벙커를 이용해 참호전을 하면서 버텨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것이 가장 컸다. 역시 마오와 공산당군도 장제스의 공격에 버티며 대장정을 하였는데 결국 국제정세는 마오의 손을 들어주었다.

 

버티기 vs 버티기

결국 끈질긴 버티기에 운이 더해져 중원을 차지하게 된 것인데 이것 때문에 중국은 대장정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2차 세계대전 막판에 바뀐 국제정세로 인해 탈락하여 타이완섬에 갇히게 된다. 어떻게 보면 아직 장제스와 군민 당군은 패배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인데 결국 중국에게 점령당할지 아니면 중국이 분열된 후 중원 땅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아직 모르는 일이다.

일본군의 경우 3개월이면 중원 땅을 모두 점령한다는 야심 찬 계획으로 2차 세계대전 중일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육군은 세계적으로 볼 때 특출 난 것이 전혀 없었다. 중국의 자체 전력으로만 계산하면 일본이 계획했던 대로 3개월이면 끝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초반 우세를 승리로 결정짓지 못하면 답이 없었다.

 

석유 없는 전쟁

문제는 중국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지만 중원 땅에서 결정적인 물자를 얻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석유가 나오지 않았고 얻을 수 있는 고무도 없고 전비로 투입한 것에 비해 얻을 것이 많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군에 집중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상황도 아니었다. 일본이 짧은 시간 동안 세계 최고의 해군 전력을 구축했지만 자체 기술이 아닌 외부에서 지원받은 기술이기 때문에 미국처럼 항공기와 모함을 계속 찍어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 2차 세계대전 중일전쟁의 승리는 마오의 것이 되었으나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으로 말아먹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일전쟁의 비밀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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