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인 시각으로 고종과 근왕세력, 애국세력의 마지막 저항, 을사의병 분석

 

시대는 바뀌고 있었다. 각국이 자력으로 생존하던 시기는 지나고 국제 네트워크의 힘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개인이나 부족이 단독으로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를 지나 거대한 국가조차 자력으로 유지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유럽은 영국 귀족들에 의해 이러한 시스템이 완성 되고 유대계 로스차일드 가문이 이에 도전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갔다. 경제전쟁에서 밀린 영국 귀족의 대표 세력은 전쟁에서도 밀리기 시작한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한 것이다. 영국의 대표 가주 알렉산더 베어링은 새로운 투자처를 물색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했을때는 이미 청나라의 동아시아 네트워크가 완전히 파괴된 상황이었다. 청나라는 2차 아편전쟁에서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이 집권한지 3년 후. 서구권 강대국에서 기관총이 상용화된다. (개틀링건 1962년부터 배치) 중화기가 상용화되면서 작전과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열세를 뒤집는 전투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군사적으로도 비 공업국이 공업국을 이길 수 없게 되었다. 공업국이 되기 위해서는 국제 유통망을 만들거나 만들어진 유통망을 공유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청나라에서 벗어나 새로운 유통망에 들어가지 못했다. 시대를 읽는 감각이 없었던 것이다. 대한제국의 재정상태가 파탄난 상황에서 고종은 망국으로 달려가는 대한제국을 물려받았다.

 

고종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탁월한 국제감각과 위기를 극복할만한 지혜는 없었던것 같다. 일단 청나라가 망한 상황에서 고종은 러시아라는 동아줄을 잡았다.

 

■ 러일전쟁 패배 후 고종의 선택

 

당시 베어링 세력은 러시아까지 밀려났고 일본은 이러한 국제 정세에 따라 미쓰이를 통해 돈줄을 바꿨다. 때문에 판을 국제적으로 넓혀서 본다면 고종은 썩어가는 동아줄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본에 비해 비교가 안될 정도의 대국임으로 고종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승리를 예상했다. 고종뿐만 아니라 러일전쟁의 결과를 두고 서구권 사람들은 내기를 했는데 다수의 사람들이 러시아에 걸었다.

 

그러나 결과는 러시아의 패배다. 이제 고종은 저항을 할 것인지 아니면 나라를 일본에 바칠지 선택해야 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러일전쟁의 패배로 인해 친일세력이 더욱 확장되고 근왕 세력은 더욱 축소 됐다.

 

을사늑약 후 고종은 러일전쟁 때부터 계획했던 저항을 선택한다. 1905년 11월 22일 최익현에게 밀지를 보내 일본에 저항할 것을 명한다. 최익현의 호남세력을 중심으로 밀지를 받은 민종식의 충청도 의병, 정환직이 영남 의병이 거병했다.

 

을사의병의 처절한 항전

 

1906년 초부터 시작된 항전을 을사의병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을사의병은 을사년에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고 이는 을미의병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일본에 항전한 이 사건을 정미전쟁이라 생각하고 있다. 을사의병의 항전은 정미전쟁 준비기에 해당된다. 위에서 기관총의 상용화에 대해 설명한 이유가 이제부터 나온다.

 

임진왜란과 다르게 의병의 저항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중화기를 이용한 전쟁을 하려면 보급과 재정적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부분이 충족되지 못했다.

 

고종은 간도 전쟁의 영웅 이범윤을 히든카드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의병의 활약이 미흡하자 이범윤과의 연계가 어려워졌다.

 

■ 대한제국 해체 후 일어난 대규모 저항

 

을사의병은 일진회 (친일세력), 친일 진위대 (친일 대한제국 지방 군), 일본군을 상대로 고전했다. 그러나 대한제국군이 해체되면서 이에 저항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동력으로 힘을 받은 의병은 각지에서 항전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목표는 러일전쟁으로 일본의 힘이 빠진 틈을 타 서울을 탈환하고 포로로 잡힌 고종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위에서 국제 유통망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만약 고종을 구출했다고 하더라도 일본에게 승리는 불가능했다. 대신 해외로 피난하여 임시정부를 세우려는 시도를 할 수는 있는데 망국의 군주가 그러한 작업을 하기에는 명분이 약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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