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이 통치하던 시절, 조선이 살아날 마지막 기회가 있었으며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파산위기에 몰리게 되었는데요. 흥선대원군이 실패한 이유와 한계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흥선대원군은 1864년 1월 21일생으로 조선 국왕의 대리청정을 하며 사실상 조선을 다스렸습니다. 재위기간은 1864년 1월 21일 ~ 1873년 11월이며 9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무너지는 조선을 강국으로 다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의지와는 다르게 국가를 파산에 이르게 합니다. 결국 고종에게 망국으로 달려가는 열차를 물려주게 된 것인데요.

 

먼저 흥선대원군의 재위 기간 동안 세계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베어링은 동인도회사 의장으로 세계를 자신의 영지로 만들고 있던 중 유대인 세력인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일격을 당합니다.

 

국제정세에 무지한 흥선대원군

 

세계 절반의 gdp를 자랑하던 인도를 동인도회사가 장악하여 화폐경제를 주도했는데요. 로스차일드 가문은 베어링 가문을 몰아내기 위해 세포이 항쟁을 일으켜 동인도 회사를 해체시키고 인도를 영국 여왕에게 돌려줍니다.

 

영국 귀족 사회에 유대인들이 침투하여 세계경제를 석권하게 되었는데요.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 유통망 장악을 위해 군사적인 공격을 준비하며 이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이 시기에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여 조선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청나라가 1차, 2차 아편전쟁으로 무너지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유지합니다.

 

열병기로 바뀌면서 중소국은 세계 유통망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력으로 강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없었는데요. 그렇다면 조선의 마지막 카드는 청나라가 아닌 대국의 투자를 받아 국가를 운영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화폐경제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

 

외세의 힘을 끌어들였다. 자주국방을 이뤄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는데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로 북한처럼 자력갱생으로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심지어 북한도 외부의 지원으로 연명)

 

인도라는 세계 최고의 영지를 잃은 베어링 가문은 새로운 투자처를 물색했고 이 시기에 일본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메이지 유신이 일어납니다.

 

조선의 군사력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계속해서 축소되었는데 흥선대원군은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개혁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적인 개혁으로 명나라, 청나라 같은 대국이 온전했을 때 유효한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개혁을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인데요. 어디서 돈을 조달할지가 문제였죠.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포르투갈, 네덜란드와 교류하면서 국제정세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의 최선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 흥선대원군

 

그런데 조선은 국제정세에 어두웠고 특히 흥선대원군은 기발한 방법으로 상황을 반전시킬 의지가 없었습니다. 새로운 물주를 찾으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죠.

 

대신에 경복궁 복원 및 확장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당백전을 주조했습니다. 돈이야 찍어내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화폐를 담보할 금과 은도 보유하지 않았습니다.

 

경복궁은 중건 중에 화재가 나 전각과 쌓아놓은 목재가 전부 타버렸고 당백전 발행 실패로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나 국가재정이 파탄 났습니다.

 

세종대왕에게 굳건한 기반을 물려준 이방원과 다르게 흥선대원군은 이런 나라를 고종에게 물려준 것입니다. 고종은 쇄국정책에서 벗어나 새로운 물주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성과가 크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수장에게 필요한 덕목은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

 

일본은 세계적인 은광을 보유했고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아간 도공들을 이용해 도자기를 국제적인 상품으로 판매했는데요. 이러한 일본에 비해 조선은 매력적인 투자처가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고종이 코너에 몰린 베어링가의 마지막 거점 러시아와 접선하여 광무개혁을 일으킨 것이 최후의 저항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라는 물주를 잡은 것도 갑오왜란으로 인해 친일세력의 진입을 허용했기 때문에 효과가 반감되었죠.

 

고종도 세계 화폐경제를 이끄는 큰손들이 누군지 끝까지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전통적인 개혁정책으로 나라를 살리고 싶었다면 병인양요 때 힘을 보여줬다고 하더라도 이후 적극적으로 교역에 나섰어야 했습니다.

 

불평등 조약을 맺더라도 새로운 물주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야 했죠.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것을 알고서도 쇄국으로 나간 것은 청나라가 정신만 차리면 개혁을 통해 다시 상황을 뒤집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청나라는 양무운동, 병법자강운동 모두 실패하고 망하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개혁을 통해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고자 했으나 배우고 익혀온 학문과 생각의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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