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들은 전 세계 넓은 지역으로 흩어져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나라 없이 돌아다니며 장사했기 때문에 해당 지역을 점유하고 있는 국가가 나가라고 하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계의 여러나라들은 유대인을 유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정주민족은 농사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북방 초원의 유목민들은 목축과 약탈을 중요시했다. 상업을 중요하게 생각한 유대인들은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위협적이지 않았다.

 

무슬림 상인들과 함께 유대인들은 세계무역을 담당했다. 그러나 세계사 속에서 이들의 존재감은 아직 미약했다. 유대인들이 세계 역사의 무대 한가운데 등장한 것은 몽골제국이 세계 패권국가 된 사건 이후다.

 

몽골제국은 뛰어난 기마술과 징기스칸의 리더십으로 세계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했다. 몽골제국 기병들은 공성전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뛰어난 장인들을 납치하여 공성 무기를 만들었고 기술로 난관을 극복한 것이다.

 

이렇게 뛰어난 군사력으로 영토를 지배하게 된 다음부터는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복전쟁에 기여를 한 기마민족을 우대했어야 했고 피지배 민족인 한족은 철저히 지배해야 했다.

 

그러나 기마민족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강한 군사력과 정치력을 앞세워 정복 사업에 뛰어났지만 통치하기 위한 학문이 부족했다. 심지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몽골인들도 매우 많았다.

 

■ 몽골제국의 경영을 담당한 무슬림과 유대인

 

통치를 위해 문자를 사용했던 유목민이나 기마민족을 동원했지만 그 수가 너무 부족했고 관리자로 색목인들을 임명하기 시작한다. 색목인은 무슬림, 유대인, 유럽인들을 포함하는 여러 인종을 부르는 말인데 특히 무슬림과 유대인을 우대했다.

 

이들은 문화적으로도 기마민족과 가까웠다. 유대인의 시작은 해상무역을 하며 살아간 해상 유대인이다. 그러나 육지에 적응한 유대인들은 열심히 목축을 한 목축민이었으며 비단길을 통해 꾸준히 장사를 하고 지식을 쌓아왔다.

 

전투민족인 북방 유목민은 무슬림과 유대인에게 실무를 맡기고 한족을 다스렸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최초로 세계를 관리하고 경영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궁정 유대인, 기술 유대인의 원천 지식이 되었으며 르네상스 운동의 기원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어째서 동양에서는 과학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궁금해한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세계는 오래전부터 하나로 연결되어있었다. 심지어 아메리카 마저 유라시아 동북 루트로 미세하게 이어져 있었다. 때문에 유럽에서 단독으로 과학의 불씨가 타올랐다는 것은 다소 정치적 해석이 개입되었다고 본다.

 

■ 르네상스 운동의 원천기술은 어디서 왔을까?

 

과학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기 위해서는 과혁혁명 이전에 일어난 르네상스 운동을 보아야 한다. 르네상스 운동 이전까지 세계의 인구는 중국과 인도, 한국, 일본 등 아시아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로인해 중동지역이 황폐화된 이후로는 동쪽에서 가장 뛰어난 기술이 개발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것을 동양이 잘한 것은 아니다. 지역마다 잘하는 것이 있었는데 건축과 미술은 유럽이 잘했고 의료 및 기계장치 제작은 중동이 뛰어났다.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을 정복하면서  세계 각지의 뛰어난 종교인들과 기술자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이것을 몽골 통합 기술 혁명이라 부르고 싶다.

 

유통로를 장악한 몽골인들은 학문과 제작기술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그것을 잘하는 이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들을 통제한 것이 바로 무슬림과 유대인들이다.

 

몽골제국은 연이은 남방 원정의 실패와 흑사병으로 인해 몰락했다. 유대인들의 역사상 첫 번째 전성기는 이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는데 그들은 몽골제국의 최첨단 기술을 이해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집단이었다.

 

■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기 전 88년의 공백

 

무슬림과 함께 유대인들은 여러 나라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세종대왕 시절 장영실 역시 원나라 기술자 집안 출신으로 추정되고 있다. 몽골제국이 몰락하고 흑사병이 일어난 이후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난 1444년과 흑사병이 수습된 1355년 사이에 88년의 공백이 있다. 88년이라는 시간 동안 유대인들은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결과물이 르네상스 운동과 플랑드르 지역 정착이다.

 

몽골제국 시절 흑해를 중심으로 한 교역과 르네상스 운동을 시작한 주요 세력은 카라임 유대인들이다. 카라임 유대인들은 흑해 지역에 정착하여 살았는데 몽골제국 멸망 후 끝까지 그 지역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으나 전쟁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한편 유대인들은 피렌체에 모여 유대인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이들은 부유했으나 권력이 없었고 항상 추방의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중동지역의 제국이나 동방의 제국들에 비해 유럽지역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했다.

 

그나마 스페인과 프랑스보다는 이탈리아가 나았지만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다. 1443년 메디치 가문의 대코시모가 반대파의 음모에 휘말려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 메디치 은행을 관리하고 있던 동생인 로렌조 디 조반니 메디치는 형을 구하기 위해 피렌체로 달려갔다.

 

■ 메디치 가문과 유대인 네트워크의 결합

 

조반니 메디치는 군대를 원하여 반대파를 제압하고 형을 구출했다. 메디치 가문과 반대파의 투쟁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유대인 반대주의자 펠트와 사부나롤라는 유대인들을 추방시키려고 했는데 이를 막으려고 투쟁했던 세력이 바로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부유한 유대인들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유대인들은 부유할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상업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금융업과 상업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던 메디치 가문에 있어서는 꼭 포섭해야 될 세력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외국어에 능통했고 지식이 뛰어났기 때문에 동방의 지식을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고위급 유대인이 아닌 일반인 조차 비단 직조 능력이 뛰어난 기술자들로 르네상스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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