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 지방 세력들을 통합하여 통일 직전까지 만들었던 궁예. 그는 왜 신라 이후 재통일한 나라인 고려의 태조가 되지 못했을까?  궁예가 왕건에게 밀려난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결국 태조가 되기에 적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궁예가 고려의 왕이 되기에 적합했는지 사료에 있는 내용과 함께 사료에 없는 내용들도 추측할 수 있다. 태조왕건 같은 사극이나 한국사 수업에서 이러한 부분은 말하기에 곤란한 점이 있다.

 

역사적인 내용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드라마 태조왕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태조왕건은 2002년에 방영이 끝난 작품으로 벌써 20년 가까이 된 사극 드라마다.

 

이 드라마가 방영된 다음부터 궁예가 사실 폭군이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이로 인해 일반인들까지 많은 논란과 토론이 있어왔다. 이러한 논란은 궁예 쪽을 변호하거나 사료를 신뢰하는 쪽으로 기울더라도 폭력의 강도 차이 일 뿐이다.

 

궁예가 더 폭압적으로 통치했는지 아니면 덜 폭압적으로 통치했는지 차이일 뿐이죠. 결국 후삼국을 통일한 나라의 왕, 고려의 왕이 되려면 적합도가 중요합니다. 그가 통일의 과업을 거의 달성했을 때 내부적으로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건국 명분에 맞는 캐릭터

 

궁예는 신라 황족 출신인데 신라를 멸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매우 강경한 노선으로 나아갔죠. 한편 견훤은 신라 상주 (경상도 지역) 출신인데 백제 부흥의 명분을 내걸고 세력을 형성합니다.

 

궁예와 백제에 비해 왕건은 송악 (지금의 개성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고구려 부흥 명분에 딱 맞는 인물이죠. 궁예는 고려를 세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명을 마진으로 바꾸고 다시 태봉으로 변경합니다.

 

그는 더 이상 신라도 고려도 백제도 아닌 정신적으로 모두 통합된 새로운 나라를 꿈꿨는데요. 그것을 위한 기둥으로 불교의 힘을 믿었습니다. 후삼국시대에도 아직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정신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백성들을 정신적 수준에서 통합하려 했죠.

 

삼국의 후손들을 나라로 묶어줄 만한 정신적 플랫폼은 종교 즉 불교였습니다. 그러나 불교계 역시 궁예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절에서 자라긴 했지만 불교계에서 큰 입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요.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처럼 궁예는 불교계를 강압적으로 장악하려 했습니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폭력적인 강도에서 차이가 있을 뿐 불교계가 그의 생각처럼 잘 따라와 주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궁예의 정치 감각

삼국 통일이 가까워질수록 고구려계 패서 호족들은 불교계를 앞세워 권력을 세우려는 궁예를 부담스러워했습니다. 반대로 궁예는 고구려계 세력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선제적으로 전략을 수정합니다.

 

큰 강도 없는 철원으로 무리한 천도를 한 것인데요. 송악에서 산자락으로 이동하여 수도를 변경하고 자신의 기반 세력인 청주인 1천 호를 이주시킵니다.

 

심지어 살아있는 미륵이라 자칭하며 불교 카리스마로 호족들을 누르려하였죠. 역사서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궁예의 애꾸눈은 약점이자 콤플렉스였을 것입니다.

 

고대에는 외모를 중요시했는데요. 특히 눈은 세상을 바로 본다는 의미에서 정말 중요한 신체부위였습니다. 궁예는 역발상으로 심안 즉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눈이 필요 없다는 논리로 나갔습니다.

 

정상국가과 비정상 국가

그러나 미륵이니 관심법이니 하는 것들은 궁예를 따르는 세력으로 하여금 안정감을 주지 못하고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죠. 한편 왕건은 후백제의 남쪽인 진도와 나주를 점령하여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공포정치로 신하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던 궁에는 왕건에게 역모를 했냐고 물어보며 압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왕건을 제거하지는 못했던 것이 그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잘못 버튼을 눌렀다가 폭발해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한 것이죠. 결국 군부에 있던 궁예 반대파들이 왕건을 옹립하고 궁예를 축출합니다. 태조왕건에서는 이 장면을 멋지게 표현했는데요.

 

패서 호족이 직접 일으킨 쿠데타는 아니지만 이미 여러 호족들의 심중을 헤아려서 일을 진행한 것 같습니다. 궁예가 축출된 이유는 다양한 각도로 분석할 수 있는데요.

잘 만드는 사람과 잘 지키는 사람, 둘다 잘하는 사람

세력을 확장하는 능력은 대단했지만 그가 원했던 이상국 마진 또는 태봉의 군주가 되기 위한 현실감각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반면 왕건은 정치 천재였고 이러한 차이로 인해 민심을 잃은 것이죠.

 

궁예는 무리한 천도로 인해 민심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불교 장악도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패서 호족을 화나게 했으며 조급하게 자기 세력을 늘리고 공포정치를 이용하여 자신의 방향대로 끌고 가려했습니다.

 

후삼국 통일 후 고려의 왕이 되기 위한 조건이 맞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렇다면 이러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천재적인 능력이 있거나 자기 분수에 맞게 포지션을 다시 정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궁예는 901년 재위하여 918년 축출당했다. 그의 능력은 거기까지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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