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 전 당말기, 송나라 시기 원시산업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기술이 발달했다. 그러나 송의 기술로 유목 제국인 몽골을 막을 수 없었다. 몽골제국은 기병을 이용하고 공성은 주변 기술자들을 납치해서 공성 무기를 만들어 공략했다. 1276년 몽골제국의 쿠빌라이 칸은 남송의 수도 임안을 함락시켜 남송이 멸망한다.

 

그러나 송나라의 백성들과 신하들은 끝까지 저항했는데 육수부, 장세걸, 문천상 등 중신들이 구심점이 되어 잡혀간 공제의 이복형 단종을 황제로 세운다. 그러나 몽골 병사들에게 점점 밀리면서 어린 단종은 곧 병사하고 그의 동생인 조병을 황제로 다시 세운다. 대항해시대 이전 해상왕국이었던 남송은 수군이 강력했다. 육지에서 끝까지 저항하던 문천상이 원나라 군에 잡히면서 중원의 남쪽 끝인 애산을 기점으로 남은 남송 군이 모두 모이게 된다.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송나라 조정에 의병 20만이 모여 애산에 집결한다. 구 황족이었던 시 씨 가문이 애산에 합류하면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한다 몽골제국 원나라는 재빠르게 한족 기술자를 모집하여 원 수군을 구축했는데 군선에 포를 장착했다. 남송 역시 군선에 함포를 장착했는데 1인치 포로 추정된다. 첫 번째 이미지는 원나라 수군의 포선이다. (함포를 장착한 군선)

 

남송 함대는 화공에 대비하여 진흙을 칠하며 철저히 준비했다. 애산은 중국 남부의 섬인데 임시로 행궁 300칸을 짓고 군대 막사 3천 칸을 지어 문무백관들이 거주했다.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무신정권과 똑같은 상황이다. 원나라군 2만, 400척의 포선, 송나라군 20만 포선 2000척으로 송나라 군세가 터 컸다. 그러나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원나라가 지속적으로 포선을 만들어 지원군을 보낸다.

초반에는 뛰어난 남송의 포선들이 수차례 원나라 포선을 격파했다. 그러자 원나라 장군 장홍범은 말려 죽이기 작전을 시작했다. 식수와 식량을 철저히 차단했다. 남송 병사들은 마른 식량과 바닷물을 마시며 버텼으나 사기는 점점 떨어졌다. 남송의 장군 장세걸은 연패의 기억, 떨어진 사기를 이유로 방어적인 작전을 세운다. 지형적 이점을 살려 입구를 틀어막고 해전에서 전술적 우위로 승리를 노리는 것이 아닌 대형 포선을 밧줄로 묶어 항구에 집결했다.

 

임진왜란에서의 이순신 장군과는 다른 선택이다. 아예 포선 사이에 방어막을 설치하여 거대한 성벽을 만들고 중앙에는 황제의 배를 배치했다. 도망칠 수 있는 길을 틀어막아 모두 장렬히 전사하겠다는 각오인 것이다. 전투 시작 시 포격전으로 양측은 모든 화력을 쏟아부었고 원나라 몽골군이 접근하여 백병전이 시작됐다. 결국 20만 중 살아남은 10만의 군사가 싸우다 죽고 남은 사람들은 백성 포함 바다에 몸을 던져 전부 자결한다.

"배는 말보다 많은 물자를 효율적으로 수송할 수 있다. 함포를 장착한 포선의 개발은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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