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는 대운하를 이용하여 물자를 북경으로 수송했는데 운송 비용이 높아 해상 운송을 통해 비용을 줄이려고 했다. 1282년 수송선 60척을 건조하여 선원을 모집하여 해로를 이용해 1283년 3월 북경으로 들어온다. 들어간 운송 비용에 비해 많은 물자를 수송할 수 있어서 원나라는 본격적으로 해상 운송을 중시하게 된다.

 

해상운송에 맛을 본 원나라는 그 해 조운선 2000척 건조를 지시했고 1285년 3000척을 건조한다. 1290년에는 연간 운송량이 159만 석이 넘어가면서 원나라의 경제에 있어 해상 운송은 또 하나의 생명줄이 되었다. 문제는 바다에서 날뛰는 해적으로부터 조운선을 보호해야 된다는 것이다. 해적을 효율적으로 격퇴해야 운송 효율을 올릴 수 있고 더욱 강력한 군사무기를 개발하게 된다.

1332년 원나라에서 4인치 크기의 청동 대포가 만들어진다. 이전에는 1인치 크기의 대포로 살상 효과가 크지 않았으나 4인치로 커지고 단단해지면서 살상력도 올라갔다. 더욱 발전된 군사무기인 청동 대포는 해적들이 만들기 어려운 높은 기술 수준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원나라 해군이 배에 설치한 대포를 이용해 해적을 격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포와 함께 공성 투석기 형태의 군사무기로 화약탄을 투척하기도 했다.

 

원나라는 1279년 애산 해전에서 세계 최초로 대규모 해전 시 해상 포격전을 했으며 이는 포를 배에 설치한 포선 시대가 시작되는 기원이기도 하다. 이전까지는 수군이나 해군이 배끼리 충돌하여 근접전을 벌이거나 활을 쏘고 불을 붙여 태우는 화공이 전부였다. 원나라는 해군이 이용할 수 있는 군사무기를 개발하여 해적을 격퇴했지만 시대의 한계상 모두 격퇴하지는 못하고 해적과 공존했다. 그러는 와중에 1341년 연간 수송량이 360만 석을 돌파하여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수송량을 달성하게 된다.

원나라는 일본 원정, 인도네시아 자바섬 원정, 베트남 원정, 미얀마 원정 등 대군을 동원해서 초원길, 비단길에 이은 바닷길을 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완전한 실패는 아니고 절반의 성공이다. 일본 원정은 대실패로 몽골의 국제적인 위상에 스크래치가 났지만 베트남에서는 3차 원정을 통해 완전히 점령하지는 못해도 조공국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대규모의 군을 동원하고도 그 이상으로 얻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형 정크선에 청동 대포를 장착한 원나라의 전함은 해상에서 아무도 막지 못했다. 그러나 수중에 말뚝을 박아 썰물 때 배가 걸리게 한다던지 태풍으로 인해 수몰되거나 상륙 후 보급선이 파괴되는 등 상륙전에서 매우 미숙했다. 해상 위의 전투를 포기하더라도 군사무기의 차이를 극복하고 이후 전투 단계에서 뛰어난 전략으로 몽골 해군을 물리쳤다.

"쿠빌라이의 남방 원정 실패는 서쪽의 육상 전투에서 지원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고 몽골제국의 성장이 멈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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