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3대 수전이라 하면 적벽대전, 비수대전, 파양호 대전을 말할 수 있습니다. 흑사병으로 인해 원나라가 몰락하면서 중국을 차지하기 위한 격전이 벌어지는데 이중 가장 큰 전투가 파양호 대전입니다. 강에서 진행된 파양호 대전은 배 위에서 각종 화약 무기를 이용해 싸웠으며 정규군은 아니지만 애산 해전 때 보다 질적인 면에서 한 단계 발전한 수전이 진행되었습니다.

 

명교 세력을 이끄는 곽자흥은 자신의 후계자로 주원장을 키웠고 또 다른 명교 세력인 서수휘는 부하였던 진우량에게 참살당한다. 진우량 세력은 강남을 지배하고 있었고 주원장 세력보다 몇 배나 강성했다. 그러나 전술적 판단과 전투력이 더 높았던 주원장 군에게 밀리게 되고 파양호 인근에서 결단을 내린다. 전재산을 모두 투자하여 대수군을 건설하고 주원장의 세력을 막아내겠다는 것이다.

진우량 수군은 높이가 30미터나 되는 대형 누선 위주로 만들었고 주원장 수군은 작고 빠른 배위주로 만들었는데 실전에 투입해보니  작고 빠른 배가 훨씬 효율적이었다. 진우량군은 기록에 60만으로 되어있지만 최대 30만으로 추정되며 주원장군은 최대 10만으로 추정된다. 주원장군은 진우량군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호구와 경강구에 진을 쳤다. 승리시 완전히 격퇴하여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조치한 것이다.

 

진우량군은 홍도부 남창의 포위를 풀고 파양호로 나가 양군이 처음 맞붙게 된다. 주원장군의 주력 장수인 서달은 상류의 흐름을 타고 유리한 포지션에 있던 진우량군에게 돌격해 1500명을 격퇴하고 선봉을 타격했다. 일제히 수십만 대군이 맞붙었는데 주원장군의 장수인 유통해가 화포를 이용하여 적군의 함선 수십 척을 파괴했다. 진우량군의 장정변이 주원장을 직접 노렸으나 실패했다. 주원장은 주력 장수인 서달을 혹시 모를 장사성군의 공격에 대비해 남경 응천부로 보내고 다음날 전투를 계속했다.

30미터의 대형 누선을 보고 주원장군은 사기를 잃었는데 전투 상황에서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공격할수 있으니 누선을 탄 진우량군이 우세했다. 낮 12시가 되자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주원장은 이때를 노려 7척의 결사대를 선발하여 화약과 갈대를 싣고 화공을 가했다. 쇠사슬로 연결되어있던 거대한 누선들은 엄청난 속도로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주원장 수군의 작고 빠른 배들이 포위하여 적 2천명을 죽였다. 나머지 군사들은 물에 빠져죽거나 불에 타죽으면서 대패 하고만다.

 

이렇게 진행된 파양호 대전이 바로 삼국지 연의 적벽대전에서의 전투 상황인것으로 묘사된다. 실제 적벽대전은 이런식으로 진행 되지 않았다. 경강구와 호구에 주둔해있던 주원장 수군에게 막혀 후퇴 조차 실패하자 최후의 백척으로 마지막 돌격을 감행한다. 여기서 진우량은 즉사하면서 완전히 망하게 된다. 남은 세력을 모조리 흡수한 주원장은 파양호대전 이후 오왕에 등극하며 장사성 및 남은 세력들과 큰 격차를 벌리게 된다.

"애산해전으로 송이 망하고 몽골제국에 점령당했으나 파양호대전으로 명나라를 세운다"

 

 

진포대첩, 진화한 고려 수군의 대승 1380

진포대첩의 배경이 되는 당시 상황은 이렇다. 몽골제국이 세계를 지배했고 경쟁이 되는 국가는 단 한나라도 없었다. 그저 몽골 제국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집트 맘루크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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