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포대첩의 배경이 되는 당시 상황은 이렇다. 몽골제국이 세계를 지배했고 경쟁이 되는 국가는 단 한나라도 없었다. 그저 몽골 제국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집트 맘루크 왕조,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외롭게 방어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강력한 몽골제국도 흑사병으로 망한다. 고려는 몽골제국과 연합하여 황금 가족의 일원으로 중국 한족의 비참한 생활에 비해 국제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렸다.

 

몽골제국 최고 지위에 오른 기황후는 모국인 고려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지만 이미 자신이 차지한 자리 부터가 썩은 동아줄이었다. 몽골제국은 흑사병을 통제하지 못했고 영향력을 상실해 가던 중 침몰하는 배의 선장을 고려 출신 여인에게 맡긴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목 제국은 지배하다 영향력을 상실할 경우 원래 살던 곳으로 미련 없이 돌아가거나 현지인과 동화되는 패턴을 반복한다.

고려 내부적으로는 공민왕의 개혁실패 외부적으로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침입이 겹치면서 양면 공격을 받게 된다. 몽골과는 외교적인 해결이 가능했지만 홍건적이나 왜구는 외교적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무조건 물리쳐야만 하는 집단이다. 1279년 세계 최초로 원나라와 송나라가 화포를 이용한 해전을 치웠는데 이것이 바로 애산 해전이다. 고려는 수군이 따로 편성되지 않았고 화포와 폭탄을 이용해 공격을 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다.

 

고려의 백성들은 왜구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바다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 산에 숨어 살아 극도로 피폐해졌다. 고려의 장수들은 필사적으로 수군을 구축했는데 왜구의 500척이 넘는 선단에 매번 박살났다. 절망밖에 남지 않는 상황에서 최무선이 화포를 개발해 점차 새로운 고려의 수군으로 거듭난다. 최무선은 공민왕 시절부터 화약과 화포 기술을 연구했고 명나라의 화약 기술을 들여왔는데 우왕 시절 진포대첩에서 처음으로 활용하게 된다.

1380년 8월 진포에 정박해있던 왜선 500척을 상대하기 위해 함포를 장착한 고려의 포선 100척이 출격한다. 해도 원수 나세 장군과 부원수 심덕부, 최무선 장군이 함께 왜선을 공격했는데 이때 고려의 포선 100척은 고려 수군의 모든 전력이었다. 왜구들은 함선을 서로 연결하고 약탈하기 위해 상륙했는데 이 타이밍을 노려 고려 수군의 화포가 불을 뿜었다. 함선들이 격침 되면서 불이 붙었고 타 죽거나 바다에 익사하는 왜구들이 많았다.

 

도주하는 왜구를 추격하여 왜선 9척을 나포하고 334명의 포로를 구출했는데 진포대천은 그야말로 500 대 100의 대승으로 끝났다. 조선왕조실록 최무선 졸기에는 왜구가 점점 덜해지고 항복하는 자가 서로 잇달아 나타나 바닷가 백성들의 생업이 회복하게 되었다고 나왔다. 고려 수군에 의해 전멸되고 육지에 고립된 왜구들은 끝까지 저항하다 황산대첩에서 이성계가 모두 토벌한다.

 

"진포대첩 이후 고려는 함포를 장착한 포선을 소유하게 되었고 조선 수군이 계승한다"

 

 

 

군사무기 편, 원나라 4인치 포선으로 바다를 지배하다 1332

원나라는 대운하를 이용하여 물자를 북경으로 수송했는데 운송 비용이 높아 해상 운송을 통해 비용을 줄이려고 했다. 1282년 수송선 60척을 건조하여 선원을 모집하여 해로를 이용해 1283년 3월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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