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차 원정후 원나라의 칸인 쿠빌라이에게 전적을 부풀려 허위보고하고 쿠빌라이 칸은 외무차관급 예부시랑과 국방차권급 병부시랑 및 사신단 30명을 일본에 파견한다 그러나 호조 도키무네는 고려 수행원 4명을 제외한 모두를 참수해버린다. 이때 상황은 마지막 남송의 남은 잔당 세력을 애산 해전에서 전멸시키고 제국이 완성되었을 때이다.

 

애산 해전은 세계 최초로 포를 장착한 전함끼리 대규모 해전을 벌인 전투이다. 1차 원정 때는 해군 운영이 기마민족인 몽골군에게 어려운 미션이었으나 애산 해전이 끝난 후 2차 원정에서는 세계 최강의 해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원나라 몽골 연합군은 마산 합포에서 출발하였고 원나라 강남군 (구남송 군) 은 다카시마에 한 달 늦게 도착하였다.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는 4만 5천의 원나라 고려 연합군을 주력으로 하고 10만의 강남군은 몸빵으로 생각했다. 강남인들은 몽골제국에 있어 최하층 노예였고 원나라에 가장 많은 원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원정 가서 죽어주면 고마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강남군은 시간을 끌며 한 달 늦게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원나라의 최정예 부대는 투입하지 않았다. 그이유로는 몽골 초원과 서쪽 세력들이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을 인정하지 않고 아리크부카를 대칸으로 추대해서 주력을 뺄 수 없었다. 칭기즈칸은 몽골인들이 초원에서 생활하는 습관을 버리면 안 된다고 유언했기 때문에 명분에 있어서는 아리크부카가 유리했다. 그리고 태풍으로 인해 추가 병력 지원이 어려워 주력을 보내기에 부담스럽기도 했다.

원나라 고려 연합군인 동로 군은 태풍이 오는 시기를 고려하여 1차원정보다 일찍 출발했다. 1281년 5월 3일 합포에서 출발하여 18일만인 21일에 쓰시마 섬을 공격했다. 이번에는 일본 가마쿠라군이 철저한 준비를 했기때문에 점령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5월 26일 동로군은 이키섬을 목표로 공격했고 막부군을 전멸시킨 뒤 섬을 점령했다. 이키섬의 막부 군은 죽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 전멸했다. 6월 6일 1차 원정 때 상륙했던 하카타만으로 진격했으나 2미터 높이의 방루를 쌓아놓고 방어를 위해 총집결해있는 것을 보고 방향을 돌려 시카노 섬에 상륙했다.

 

오토모 가문의 당주인 오토모 요리야쓰는 동로 군이 상륙하자마자 선공을 가했고 이틀 동안 싸우다 다시 이키섬으로 들어가 20일 동안 야영을 한다. 지각을 한 강남군과 합류하여 맨 처음 공격 목표였던 하카타 만 공격작전을 세운다. 막부 군의 빈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동로군 단독으로 공격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날 하카타만의 결전을 위해 원나라 연합군은 잠이 들었는데. 엄청난 폭풍이 불어와 2000척이 넘는 함선들이 박살나 버린다.

총사령관인 훈둔과 주요 지휘관들은 부하들을 버리고 철수해버렸다. 이 전쟁에서 왜구를 소탕하고 몽골제국내 입지를 다지려 했던 고려군이었으나 몽골군이 소극적인걸을 보고 대비했는지 2만 병력이 무사히 탈출했다. 나머지 군사는 익사하거나 일본의 막부 군에게 잡혔는데 중요인물들은 모조리 참수되고 농사가 가능한 남송인들을 살려주고 나머지는 노예로 삼았다. 애산해전에서 엄청난 경험을 쌓았던 원나라 해군은 바다 위에서 강력했으나 애산 해전과는 달리 후속 지원이 없는 일본 원정 특히 상륙전에서 자신감 없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원나라는 화약무기를 사용하는 세계 최초의 대 해군을 구축했으나 원정 전투 시 상륙전에는 미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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