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5년 몽골제국의 쿠빌라이칸이 남송 공격계획을 회의하던 중 고려인 조이가 일본을 끌어들여 남송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올렸다. 이때 쿠빌라이칸 ( 원나라 황제 )은 일본의 존제를 인식하고 일본정복을 구상한다. 1268년 일본 다이자후에 사신이 가서 국서를 전달했으나 일본을 지배하고 있던 가마쿠라 막부는 무시로 일관했다.

 

가마쿠라 막부는 대외적으로 한번도 점령 당한적이 없는 일본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내며 단호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공포에 휩싸였으며 종교계 포함 전국민을 총동원하여 대비 했다. 1270년 고려에 둔전경락사를 설치하여 군량과 전쟁에 필요한 것들 미리 준비 했다.

1271년 몽골제국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는 천황과 교섭을 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는데 가마쿠라 막부의 최고 권력자인 호조 도키무네는 단호하게 거절 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18세 였다. 한편 원나라군과 김경방이 고려군을 이끌고 여몽 연합군을 처음 결성하여 삼별초가 있는 진도로 공격했다.

 

삼별초는 끝까지 몽골에 저항하는 세력이며 궁으로 들어가는 조운선을 약탈하면서 세력을 유지했다. 원나라 고려 연합군은 불창화포를 쏟아부어 삼별초를 몰아내었고 총대장인 배중손이 전사했다. 김통정은 잔존 세력을 이끌고 제주도로 피신한다. 1272년 1273년 제주도에서 끝까지 항전하는 삼별초를 모두 토벌하고 일본 원정을 결의했는데 삼별초와의 전투는 일본 원정을 위한 최고의 훈련이 되었다.

1274년 전함 300척 상륙선 300척 물을 보급하는 급수선 300척 몽골군 2만 5천 고려군 1만 4천 총 4만에 달하는 병력이 10월 3일 고려 경상도지역 합포에서 일본을 향해 출발했다. 당시 몽골은 동유럽의 절반을 점령한 킵차크 칸국, 중동의 일칸국, 지금의 신장 위구르와 사마르간트가 있는 중앙의 차가타이 칸국, 몽골초원과 만주, 화북, 티벳지역을 포함하는 원나라가 남송을 침공해 들어가며 대제국을 형성했다.

 

원나라 몽골 연합군은 이키섬을 순식간에 점령하고 10월 17일 규슈 다카시마에 상륙하여 일본 막부군이 구축한 산성을 격파 하였다. 이때 화약무기인 철포로 공격했는데 막부군은 혼비백산 했으며 개인전술 위주의 일본군이 체계적인 전술을 구사하는 몽골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10월 19일 지금의 후쿠오카시 하카타만으로 상륙해 교두보를 확보하고 3개 방면으로 대규모 상륙작전을 시작했다. 10월 20일 김방경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선봉에 서서 막부군을 도륙했고 몽골군이 합류 하여 하카타만의 해안 방위선 30km되는 지역을 모두 붕괴 시켰다.

막부군은 후퇴하여 다이자후 (규슈) 최후의 본진이 미즈성에 집결했는데 더이상 공격하지 않고 해안으로 돌아가 배안에서 휴식을 했다. 그런데.. 10월 20일 새벽 하카타만에 대폭풍이 몰아쳐 군함 200척이 침몰되어 고려로 철수했다. 배안에서 휴식을 한 이유로는 원나라 고려 연합군 총대장인 훈둔이 송나라와 전쟁시 후방을 안정시키려는 전략적 목표를 이뤘다 생각하고 철수 준비를 했다는 설이 있다. 결국 철수가 아닌 1만 5천명이 군사가 죽으며 참패 하게 된다.

 

"남송공격시 후방 안정을 위해 일본을 공격했으나 기상예측 실패로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기만 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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